드디어 걷기 싫어지는 날이 왔다.
어제 시작한 생리가 오늘 허리 통증을 동반한 생리통을 일으키고 말았다.
몇 달 전 생리대를 바꾸고 나서 생리통이 잦아들어 진통제를 안 먹은 지도 꽤 되었는데 별안간 또다시 시작되는 허리 통증에 오전에는 뒹구르르 구르다가 화장실도 열댓 번은 들락날락 했다가를 반복했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 다시 잠이 들어 버릴 것 같았다.
기어코 일어나 이불을 세탁기에 넣었다.
1시간 45분.
딱 이불 빨래가 끝날 때까지만 누워 있자.
다시 이불을 파묻고 누웠다가 오늘은 안 되겠다. 진통제를 먹어야 하나 보다.
일단 밥을 먹어야겠다.
어제 엄마가 싸 놓은 주먹밥이 남아 있었다.
주먹밥을 으깨고 계란을 풀어 넣어 볶음밥을 했다.
열무김치와 함께 한 끼를 든든하게 먹었다.
진통제를 먹기 전에 영양제를 먼저 챙겨 먹었다.
비타민D는 몇 년째 끊이지 않고 먹는 유일한 영양제이다.
영양제를 먹었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진통제를 먹어야겠지?
그러는 사이 세탁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을 펴 방바닥에 깔았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참을 만하네? 밥을 먹어 기력이 생긴 걸까?
집에 있다 보면 더 아플 거 같아 노트북을 챙겨 동네 카페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근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혼자 무언가 열심히 하면 희한하게 더 집중이 된다.
아무래도 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인가 봐..
그렇지만, 집중은 잠시뿐이다.
웹서핑을 했다가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보다가 책을 끄적끄적 읽다가(요즘은 알랭 드 보통 <불안> 읽고 있다.)
미드를 보다가(나는 빅뱅이론을 좋아한다.) 산만하게 이것저것 시도만 해보고 짐을 꾸려 나왔다.
이제 걸으러 가야지?
집에 들러 짐을 던져 놓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동네를 조금 걸어 볼까 싶어 동네를 서성거렸다.
작은 동네라 한 바퀴 돌면 갈 곳이 없어 논두렁으로 걸어갔다.
걷고 계시는 동네 어르신 몇 분이 계셨고,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 인지 아저씨 한 분이 논두렁 옆 작은 냇가에 수문을 열고 계셨다.
물이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물이 흐르는 냇가를 따라 걸었다. 그렇지만 거리가 길지 않아 금방 돌아와야 한다.
길 끝까지 걸어가 2차선 도로를 건너고 다시 풀숲을 지나면 바다가 나오지만 오늘은 바닷가까지 갈 생각이 없다.
다시 돌아 걷는데 조금씩 소변이 마려워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나설 때 물을 한 잔 먹고 나왔는데 그게 벌써 신호가 온단 말인가.
발걸음을 조금 서둘러 걷는다. 걷다가 옆에 청보리가 너무 예뻐 보여 카메라를 켰다.
잠깐 3초? 멈췄을 뿐인데.. 더 신호가 오는 기분이다.
청보리고 뭐고 일단 집으로 빨리 가야 할 거 같다.
(청보리가 아닌가.. 시골 태생이지만 농작물을 잘 모른다.)
서둘러 집으로 와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오니 사람 마음이 참..
집으로 올 때는 소변만 보고 얼른 다시 나와 걸어야지 했는데.. 잠깐 쉰다는 게 다시 핸드폰만 하고 앉아 있는 나를 돌아봤다.
6시가 넘었는데 조금만 더 밍그적거리다가는 오늘 걷기는 끝이 날 거 같아 엉덩이를 들었다.
다시 마스크를 쓰고 매일 가던 공원으로 향했다.
매일 걷고 있는 코스로 한 번 갔다 오기로 한다.
해가 많이 길어져 여전히 밝다.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얼른 갔다 오려고 조금 서둘러 걸었다.
걸어 올라가며 첫날에 놓았던 솔방울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갔거나 누군가 치웠을지도 모르겠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아저씨가 부러웠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쁘던데 저렇게 지구력이 좋으시다니.
나도 걷기를 시작으로 언젠가 마라톤을 하시는 분들처럼 오래 뛸 수 있는 날이 올까? 하고 혼자 잠시 생각해 봤는데 아주 아주 먼 일이 되지 않을까? 라고 금세 결론을 내렸다.
어제 물집이 잡힌 뒤꿈치에 밴드를 두 겹을 붙이고 나왔더니 통증이 없어 다행이다.
혹시나 또 엄살을 부리게 되지 않을까 괜한 노파심이 생겼는데 그러지 않아 참 대견하다.
그래도 걷겠다고 양 발 뒤꿈치에 밴드 2개씩 붙이고 나왔으니, 걷기에 이 정도의 열정이 있었구나 싶기도 하다.
이 코스도 가다 보면 결국 끝은 바다다. 역시 여기도 바닷가까지는 내려가지 않고 바다에 다 달았을 즈음에 돌아섰다.
점점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 돌아올 때는 가로등이 켜졌다.
앞 뒤로 한 두 분 정도씩은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옆 풀숲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더 밝은 불빛이 있는 곳까지 빨리 걸어야겠다 싶어 속도를 냈다.
사람이 보이면 안심이 됐다.
희한하게 골목길에서는 낯선 이를 경계하게 되는데, 아무도 없는 공원은 오히려 사람이 반갑게 여겨지는 게 참 신기했다.
이곳은 모두 운동을 하러 왔다고 생각해서 일까? 두려움도 믿는 만큼만 느껴지나 보다.
오늘 걷기는 너무 늦은 시간에 끝이 났다.
이젠 조금 일찍 걸으러 나서야겠다. 괜히 살짝 무서운 기분이 들어 돌아올 땐 별로였다.
걷기를 하면서 가장 좋은 때는 집으로 돌아와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샤워를 할 때, 샤워를 마치고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발바닥이 시큰시큰거릴 때, 만보기가 어제 보다 많이 찍혀 있을 때이다.
역시 걷는 것도 과정보다는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오는 행복감이 더 큰 거니?
걷기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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